5월 1일. 첫 날 답게 ’시작’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에 두고 초면인 몇몇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 1일이라서 시작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고, 때마침 무언가를 시작하려는 사람들과의 만남이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나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생각하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이 편지를 읽는 분 중에서도 ‘심진’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처음 알게 된 사람들이 있을테니, 재작년 이맘때 이야기부터 시작하면 좋겠다.
내가 인스타그램에서 운영하는 심진노트(@simzin_note) 계정은 다른 영감 노트와 마찬가지로 마케터 숭(@2tnnd)님을 따라 계정을 만들어 영감이 되는 것을 모으자는 의도로 시작했다.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광고홍보학과를 전공했으나 이렇다 할 경험이나 스펙이 없었고, 광고나 마케팅이 재미있으니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으므로, 시선을 잡는 것들을 차곡차곡 모아 나만의 관점을 가지고 싶었다.
첫 번째 시도는 남들 따라 시작했다. 걷다가 무심코 보이는 재밌는 광고나 간판을 찍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사람 많은 곳에서 찰칵거리는 셔터 소리의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한 나는 금세 흥미를 잃었다. 다음 시도는 내가 직접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었는데, 중학생 때부터 포토샵으로 로고 같은 걸 만들기 좋아했던 터라 독학과 학원을 병행해 몇 가지 디자인 툴을 다룰 수 있어 비교적 쉽게 시작할 수 있었다.
디자인 툴을 다룰 수 있다는 건, 내가 머릿속으로만 상상하던 것을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게 표현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는 분명한 디자인의 장점이지만, 반대로 내 머릿속에 있는 대로 구현되지 않을 때면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이렇게 하면 예쁠 것 같았는데, 막상 해보니 하나도 안 예쁜 것들의 연속이었다. 요리조리 뜯어 하나씩 배운다면 어떻게든 만들어 낼 자신은 있었지만, 디자이너가 될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시간을 너무 많이 투자해야 해서 포기했다.
어떻게 해야 오래 할 수 있을까, 꾸준히 할 수 있을까.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이런 고민을 하게 된 건 내가 다른 사람에게 아주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란 걸 느낀 시점부터다. 그 영향이 선하든 선하지 않든 내가 하는 말이 더 이상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들어줄 사람이 없어 쓰기 시작한 블로그에, 모르는 사람들이 들어와 댓글을 하나둘 남겨준 것이다. 댓글을 읽고 나면 어김없이 다음 날엔 더 잘 쓰고 싶어졌다. 직업에 보탬이 되는 경험을 넘어서 나를 기쁘게 자극하는 동기였다.
한 잡지사의 100일 글쓰기 프로젝트에 참여해 돈을 내고 96일 동안 글을 쓰기도 했다. 그 프로젝트를 하며 얻은 건 글쓰기 스킬이 아니라 ‘계속 글을 쓰기 위해서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즐겁게 쓸 수 있어야 한다’는 깨달음이었다. 오늘 쓴 글을 아무도 봐주지 않아도 내일 또 글을 써야 했으니까. 그러려면 첫 번째로 내가 독자가 되어서, 나를 기쁘게 하거나 나에게 도움을 주는 글부터 써보자고 생각했다.
그 무렵 가족과 함께 있어도, 친구들 사이에서도, 직업적으로도 내가 기쁘게 자리할 곳이 없다고 느껴 많이 불안해했다. 이 불안도 블로그에 재미를 붙였을 때처럼 나와 전혀 관련 없는 타인의 이야기에 힘을 얻어 불안을 해소하곤 했다. 그게 바로 유튜브에서 봤던 수많은 영상이다. 영상을 보며 좋아서 찍어둔 수많은 스크린샷이 있었고, 어떤 점이 좋았는가 이유를 생각하며 쓴 글을 감상으로 덧붙여 매일매일 올렸다. 작업 시간은 짧으면 30분, 길어도 2시간 내로 끝낼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뒤 석 달이 지나자, 팔로워 3천 명이 넘었고 지금까지 유지 중인 것이다.
이렇게 길게 쓴 소개조차도 인스타그램 성장 자체에만 집중해 짧게 축약한 버전이지만, 굳이 과거를 되짚어 본 이유는 우리가 늘 ‘시작’ 앞에 망설이는 존재인 것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가끔가다 실행력이 엄청난 사람도 만나보곤 하지만, 그조차도 시작 앞에 망설여 본 경험 한 번쯤은 있었을 것이다. 누구든 시작 앞에서 보장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팔로워 숫자가 더 이상 늘지 않네, 나한테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는데…’ 같은 생각을 하면서 좌절하는 밤이 왜 없었겠나. 극복하기 위해 나름대로 야심 찬 기획을 하고 시도했으나, 기대했던 반응을 얻지 못할 때 새로고침을 1분에 몇 번이나 하는 마음을 왜 이해 못 하겠는가. 그럴 때면 이렇게 생각하기로 한다.
‘시행착오 중 한 사례가 되겠구나!’
이런 일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경험 하나 벌었다 치자는 거다. 쟤도 잘 안될 때가 있구나, 쟤도 고꾸라질 때가 있구나. 그때의 ‘쟤’가 되어보자는 것이다. 시행착오의 뜻을 찾아보니 영어로는 trial and error이다. 시행착오는 ‘시험과 실패(fail)’가 아니라 ‘시험과 실수(error)’다. 누구든 실수하지만, 부끄러우니 말하지 않아 모를 뿐이다. 남들에겐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고,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성공한 사례 뿐만 아니라 실수한 사례도 많아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어차피 더 나아질 사람에게 실수는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니 말이다. 시작하는 사람들이 실수를 괜찮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라 느낄 수 있었으면. 그런 실수 하나쯤 괜찮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실수로 인해 분명 더 좋아질 거라고 말해보면 어떨까. 여러 시작을 앞둔 나에게 건네는 말이기도 하다.